해방 이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한국 디자인계에서는 지나온 과거에 대한 질문은 커녕 현재와 미래에 대한 논의 하나 변변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언제 우리 주변에서 ‘디자인에 있어 탈식민성’이 무엇인지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또한 21세기라는 시간의 변화와 한국이라는 공간에 부여된 디자인 문화의 담론을 지적으로 끌어낸 적이 있는가? (...) 의미있는 질문과 논의가 부재하는 디자인의 현실은 자체의 철학은 고사하고 우리가 현재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좌표조차 확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보편적 지식 체계를 갖지 않은 상태에서 대중들에게 알려진 디자인은 단순히 ‘상품 치장술’에 불과한 이미지뿐이다. 왜냐하면 디자인이 무엇이냐고 묻는 일반인들에게 그 동안 디자인계는 한결같이 ‘신경제 국부론의 차원에서 경제를 살리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고만 답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디자인을 경제 원리와 생산자의 입장에서 파악할 뿐 소비자 자신을 둘러싼 ‘일상 삶의 차원’에서 디자인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사람들이 정말로 알고 싶은 것은 디자인으로 나라 경제가 얼마만큼 부강해지는가 이전에 실제 자신들의 삶에서 디자인이 어떠한 의미와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 디자인은 우리의 현실, 즉 일상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애초부터 국가 주도의 산업화, 즉 조국 근대화의 도구로 시작된 것이었다. ‘미술수출’(박정희, 1967년)이라는 구호가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해 보여준다.
레이아웃의 문제는 한글이건 로마자이건 비슷한 것 같다. 그럼에도, 아무리 배열의 문제가 같다고 하더라도 한글과 로마자는 역시나 다를 것이다. 타이포그래피 앞에 ‘한글’을 붙일 때는 한글 만의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의구심이 들긴 한다.
학교에서는 라틴 타이포그래피를 기준으로 한글을 가르치고, 밖에서는 모두들 좋다고, 맞다고 하는 방식을 의심 없이 사용한다. 글자 사이, 그리고 글줄 사이와 단락과 정렬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관습대로 누구나 하고 있고, 좋다고 하는 대로 할 뿐이다.
우리 대학의 디자인과에서는 한국 디자인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왜일까. 한국 디자인사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짧아서 가르칠 것이 없어서일까. 정말 한국 디자인사는 없는 것일까. 짧든 길든 한국 디자인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짧으면 짧은 대로 길면 긴대로 자신의 역사를 알고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닐까. 문제는 역사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디자인이라는 것을 역사적 지평 위에 놓고 보려는 의식이 없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디자인이란 어떠한 역사성도 갖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실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한국 디자인의 역사가 21세기에 들어서도록 합의된 하나의 정론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주체적인 서술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미술사나 디자인사는 서구의 가치 기준으로 재단되어왔다. 역사 발전의 보편성이라는 서구의 계몽주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인간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서구 근대화의 성공 과정을 찬양했으며,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술 양식인 ‘모더니즘’을 미술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문화의 상대성이 박탈되었고, 서구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역사 발전 단계가 뒤처지는 국가이자 서구에서 실험한 조형 양식을 뒤늦게 쫓는 후진 국가로 전락했다.
한국적 근대화의 특수성 또는 모순이 생활문화에 반영된 디자인 양극화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나느 그것이 크게, 제도와 현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디자인 전문직의 위계라는 세 가지 경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몇몇 텍스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한국 디자인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역사 개념이 한국 디자인에 부재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 디자 인의 지식 체계에 역사라는 범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한국 디자인의 현실이 역사의식과는 무관한 실무 비즈니스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와 다름없다.
그러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디자인과 사진이 접목되는 분야갸 있는데, 한국의 디자인 교육에서는 그래픽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는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미지나 사진과 관련된 것들은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사소한 것에도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른다고 삶이 불편하지 않기에, 역사책을 손에 쥘 일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이 책의 독자 여러분께 크나큰 고마움을 느낍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디자이너 이전에 먼저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거야. 왜, 언제나 디자이너라는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려고 하는건가? 어쩌면 자네가 원하는 디자인조차도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만 가능해질 거야. 왜냐하면 디자이너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시민은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시민으로서의 디자이너라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한국 디자인 교육은 한계에 도달했다. 지난 50년 간 산업화 과정에서의 필요로 생겨난 디자인과 그를 위한 인력 공급으로서의 디자인 교육은 한계에 다다랐다.
한국 디자인 교육은 그 방법이나 대상의 성격이 기술주의적이고 도구론적이며 단일하다. 이러한 교육적 접근은 오로지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공급 과잉에 따른 과잉 경쟁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하여 한국 디자인 교육은 그 방법론이나 사회적 수요-공급의 측면에서라도 성장의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